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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80편] 사양(다자이 오사무)책 2024. 4. 27. 11:15728x90반응형80번째 책을 읽었다.
개인점수는 10점 만점에 10점.
인간실격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뒤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인간실격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사양'이라는 책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허무함'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평가한다. 마냥 허무한 것이 아닌 '세련된 허무함'을 표현하는 데에는 다자이 오사무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자이 오사무 작품 특유의 자조적이고 허무한,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세련되고 부드러운 필체가 유난히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읽으면서 감탄한 구절 하나만 소개하고 싶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무너져가는 일본 귀족 집안을 그린 작품이다.
가장의 사망과 더불어 패전이라는 시대 상황에 맞물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락하는 귀족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귀족의식, 특권의식은 하루아침만에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민중에게 외면당한 채, 변화된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은 점점 커져만 간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인 가즈코와 그의 동생 나오지가 행한 선택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나오지는 몰락 귀족들을 향한 민중들의 눈총과 전쟁 후유증 때문에 술, 여자, 마약에 찌들어 지내기 시작했다. 그 누구와도 쉽게 융화되지 못하고,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결국 나오지가 선택한 건 죽음이었다.
반면, 옳지 않은 방법이긴 하다만 주인공 가즈코는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가진다. 그녀의 목표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의 아빠는 유부남에 술이나 퍼마시는 상업 화가였지만 가즈코는 나오지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귀족의식을 버리고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것을 결국은 이뤄내며 앞으로 더 나아갈 것임을 시사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5번의 자살시도 끝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동반자살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본인은 살아남고 파트너만 자살에 성공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인 사람이기도 하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과 가까이서 지낸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자이 오사무와 겹쳐 보일 때가 많다. 삶의 허무함과 자신의 초라함을 이렇게 세련된 문장으로 담담하게 표현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면 작가가 본인 스스로 그들과 동일시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좋은 문장 혹은 암울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는 책이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책을 읽어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줄거리(스포 有)
우리 가족 중에서도 진정한 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은 음... 어머니 한 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미개한 행동도 어머니가 하시면 사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당히 에로틱하기까지 해서, 확실히 진정한 귀족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머니는 지금 편찮으신 상태이지만 언제나 내 걱정만 하신다.
남동생인 나오지는 대학교에 다니다가 징집되었는데 이제는 소식이 끊겨 전쟁이 끝났는데도 행방을 알 수 없다. 어머니도 포기하신 듯 하다. 나오지는 불량한 생활에 빠져들어 얼마나 어머니의 맘고생을 시켰는지 모른다.
우리가 도쿄에 있는 집을 버리고 이즈에 있는 산장으로 이사한 때는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한 그 해, 12월 초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안의 경제는 외삼촌이 돌봐주셨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외삼촌도 형편이 빠듯해진 듯 하다.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명 없는 지옥 같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 가슴 속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이사간 방은 우리 모녀가 살기에 그다지 옹색하진 않아 보였다. 우리는 식사 준비 외에는 대부분 툇마루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응접실에서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면서 거의 세상사와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나는 밭일에 힘을 쏟았다. 나는 귀족 출신이지만 전쟁 상황이 절망적으로 치닫자 노동쪽으로 징용을 당한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500명 가까운 사람들과 하루 종일 짐을 날랐고 달구질을 해야했다. 이 경험덕에 밭일도 특별히 힘들어하지 않는 여자가 됐다.
남동생인 나오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너무 기뻤지만 동생이 아주 심한 마약 중독 상태라서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돌아올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정부에서 봉쇄령이 내려와 외삼촌께 받는 경제적 지원이 끊긴다는 말도 전해들었다. 생각해보면 그즈음이 어머니와 나에게 마지막 행복의 불꽃이 반짝이던 때였다.
아무 기별도 없다가 여름날 저녁, 나오지가 돌아왔다. 나오지는 돌아오자마자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셔댔다. 그 후에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고 집을 나선 뒤 열흘 째 감감무소식이다.
나오지는 예전에도 마약에 중독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것이 내 이혼의 원인이었다. 동생의 마약빚 때문에 난 팔찌나 드레스, 목걸이 등을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마약을 끊지 못했다. 동생은 우에하라라는 소설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기에 나도 종종 그를 보았다. 엉겁결에 술도 함께 마시게 되었고 키스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게 비밀이 생긴 것이다.
나는 사랑이란 걸 몰랐다. 애정도 뭔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오해를 받았고 남편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말했으며 그 결과 내 배 속의 아기까지 남편에게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아기를 사산하자 나는 이혼을 선택했다.
이 세상에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불량하다는 건 다정다감한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난 올 여름 우에하라에게 보고 싶다는 편지를 세 통이나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그 외에 다른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터라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오지에게 그 사람 소식을 들을 때 나에 관한 이야기는 눈곱만큼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멀찍이 동떨어져 소리쳐봐도 아무 메아리도 없는 느낌의 처절한 고독이 느껴진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어머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어머니는 결핵 판정을 받으셨다. 수명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절망의 벽을 맛본 것 같았다. 내게서 어머니가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건 내 육신도 같이 없어져버리는 듯한 느낌이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일본 최후의 귀부인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언제까지나 슬픔 속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내게는 사랑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이제 사랑 그 하나에 매달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난 우에하라르 만나러 도쿄에 올라갔다.
그의 집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를 보았다. 어여쁜 부인과 아이었지만 이들은 언젠가 적이라 여기며 나를 원망할 날이 올 것이다.
술집에서 우에하라를 찾아냈다. 술을 마신 뒤 우리 둘은 밤거리를 걸었다. 우에하라는 삶이 슬프고 칙칙하다고 했다. 그래서 죽자고 술을 마시는 거라며. 우리 둘은 함께 잤고 내가 느끼는 행복감이 극에 달했을 때, 내 동생 나오지가 그날 아침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오지의 유서
누나. 틀렸어. 나 먼저 갈게.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살고 싶은 사람만 사는 게 좋아.
난 귀족이 아니라 내 계급과 다른 사람들과 융화되고 싶었어. 하지만 내겐 불가능한 일이었아. 민중들의 눈에는 난 항상 이방인이야.
무슨 일을 하려해도 움츠려 숨게 되고 앉으나 서나 불안해. 가슴은 늘 두근두근 숨을 구멍을 찾다가 점점 더 술과 마약에 빠지고 그 현기증 덕에 순간이나마 안정을 얻으려다 이 지경이 된 거야.
난 어딘가 중대한 결함이 있는 잡초야.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 우리의 죄일까? 민중에게 죄스러워야하고 끝없이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살아있는 동안 남들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남들이 베풀어주는 걸 받아야 연명할 수 있는 처지가 됐다구. 이런 상태로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해? 이제 끝났어.
모두가 내 곁을 떠나간다. 우에하라에게도 버림받았지만 내 바람대로 아기를 가진 것 같아 행복하다.
우리 모두가 도덕적 과도기의 희생자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내 도덕적 혁명의 완성이다. '사생아와 그 어미'라는 낡은 도덕에 맞서 다음에 태어날 이 아이와 함께 맞서 싸울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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